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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저기 숲이 돼볼게.
네게 길을 터보일게.
나를 베어도 돼.
아낌없이 주는 나무. 한열은 그 동화를 떠올릴 때면 남일 같지가 않았다. 기분 탓인가 싶다가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자의에서건 타의에서건 한열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맞았다.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도,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도 못하는 성격이 한몫했다. 모두가 자신을 베어가려고 눈을 뜨고 있는 삶이었다.
"이거 놓고 갔더라."
"... 아, "
지나가다 복도에서 마주친 유현이 노트를 건넸다. 어쩐지 기분이 멍해서 다른 생각을 하다가 그가 자신의 앞에 선 것도 깨닫지 못했다. 한열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앙 다물었다. 놓고 갔구나. 바보 같이. 머뭇거리고 있자니 유현이 먼저 손을 뻗어 한열의 손에 노트를 쥐어주었다. 살짝씩 손에 닿은 그 시원한 체온에 몸을 움칠, 떨었다.
"... 왜 이렇게 뜨거워."
"어..."
자신도 모르는 질문이라 뭐라 대답할지 몰랐다. 맹하게 눈만 끔뻑거리고 있자니 유현이 손을 들어 올려 한열의 이마 가까이에 대었다. 닿지는 않았다. 유현의 눈길이 한열을 향했다. 어쩐지 허락을 구하는 행위 같아서 한열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곧바로 이마에 가 닿는 시원한 손길이 느껴졌다. 아, 좋다.
"열 나, 너."
모르는 사이에 눈을 감고 있던 한열이 이마에서 떨어지는 손등에 눈을 떠보였다. 아쉬웠다. 계속 그의 손길이 제 이마에 머물렀으면 했다. 자신의 생각을 깨달은 한열이 헙, 다시금 입술을 말아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언제부터 이랬어?"
"... 모르겠어요."
"오늘은 건너뛸까?"
"아니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조금 크게 낸 한열이 화들짝 놀라서 한 걸음 물러섰다. 물론 얼마 뒤 유현이 다가와 제자리가 되었지만.
"저 정말 괜찮아요. 오늘도.... 해요, 공부."
"열나니까 말 제대로 하네."
웃음기가 감도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다정함이 깃든 것도 같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유현이 자신을 귀여워하는 것처럼 보일 터였다. 하지만 아닐 거다. 착각하지 말자 되뇌었다.
"이따 봐."
한열을 지난 유현이 걸음을 옮겼다. 한열은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서 있었다. 유현의 뒷모습에 시선이 꽂혔다. 그는 달랐다.
날 지나치지 마.
모두가 저를 베어가려고 하는 삶. 유현은 그러지 않았다.
날 보아줘.
방과 후에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그의 집에서 공부를 이어나갔다. 다만 다른 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책상 위에 따뜻한 물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유현은 항상 얼음을 띄운 시원한 물을 마시고는 했는데. 오늘 목 상태가 조금 안 좋나. 날이 춥게 느껴졌나. 작은 걱정들이 앞서기 시작했다. 한열의 몸 상태를 염려한 유현의 조치일 거라는 짐작은 감히 하지도 못했다.
열이 난다고 한 그의 말이 사실이었던 걸까.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어느덧 외투가 필요 없는 계절이 되긴 했으나 몸이 약한 한열에게는 여전히 시린 시기였다. 그러나 유현의 집은 항상 따뜻했다. 반팔에 가벼운 바지를 걸치고 있는 그를 보고 있으면 추위를 잘 타는 사람 같지는 않은데. 의문이었다. 유현과 달리 한열은 항상 몸을 꽁꽁 감싸고 있었다. 외투가 없어도 항상 긴팔을 입고 몸을 가렸다.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졸리지."
물음인 듯 아닌 듯한 문장. 유현은 단정 짓는 것처럼 물어왔다. 그 말에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연필도 놓은 채 턱을 괴고 자신을 바라보는 유현의 모습이 보였다. 졸리냐는 물음이 머릿속을 울렸다. 우웅-. 진동과도 같은 이명이 귓가를 두드렸다. 눈을 꾹, 감아내고는 떠내었다.
"몸 안 좋잖아. 잠도 오고."
"아닌, "
"문제나 제대로 풀고 거짓말해."
부정이 단숨에 끊겼다. 그의 말에 문제지에 흘끔, 시선을 주었다. 몇 십분 째 같은 장에 머물고 있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오늘은 정말 몸 상태가 별로인 게 맞았다. 이 상태로 있으면 민폐겠지. 너무 욕심을 부리고 있는 걸까. 한열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잘못을 저지르는 기분이었다.
"좀 잘래? 깨워줄게."
"집,에 갈게요. 죄송해요. 몸도 안 좋은데 괜히 제가..."
"1시간만 자. 깨워줄 테니까."
유현은 한열의 말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나쳤다. 하지만 한열은 무시받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런 유현의 태도가 자신이 여기에 있어도 된다는 허락처럼 느껴져서. 오히려 안정되었다. 한열은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고는 천천히 몸을 숙여 책상 위에 엎드렸다.
"... 뭐 해."
물론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뭐 하냐는 유현의 물음에 멍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한숨을 쉬었다. 침대는 장식으로 쓰려고 갖다 놓은 게 아니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냥 여기서 자도 되었다. 그의 침대에서 잘 수는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안 된다고 입을 열었지만 유현의 손에 이끌려 이미 침대에 도달한 뒤였다. 여전히 정신이 몽롱했다. 수마가 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끔뻑끔뻑. 눈을 한 번 감을 때마다 뜨기가 어려웠다. 몸이 안 좋은 게 맞았구나. 이불을 끌어올려주는 유현의 손길이 느껴졌다. 등이 침대에 가 닿는 순간 중력이 다르게 작용하는 느낌이었다. 눈을 감았다.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성현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야. 그 이름 부르지 마. 한열은 눈을 뜨기가 두려웠다. 눈을 뜨면 모든 게 달라져 있을 것 같아서. 속이 메스꺼웠다. 한열은 뒷걸음질 쳤다.
'성현아. 아빠가 부탁했잖아.'
'아빠 한 번만 살려줘라, 제발.'
'성현아. 성현아...'
한열은 눈을 떴다. 푸른빛이 감도는 천장. 악마를 쫓아주고 나쁜 꿈을 꾸지 않게 해주는 드림캐처. 몸을 들어 이불을 걷어내자 제 몸이 보였다. 엄마가 잠옷으로 자주 입던 스트라이프 원피스가 보였다. 고개를 돌리자 방문 옆에 자리한 거울 속에 제 모습이 비쳤다. 짧은 머리에 앳된 얼굴. 영락없는 어린아이. 11살의 강한열. 한열은 눈을 감고 현실을 부정했다. 제발 저를 사라지게 해 주세요.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해주세요. 한참을 빌었다.
강한열
흐읍.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의 머리에 닿는 손길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다정하게 머리칼을 쓸던 손길이 머리를 넘겨주었다. 한열은 눈을 뜨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손길이 내려와 뺨을 감싼 순간. 악몽을 떠올린 어린아이는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아. 어떻게 제 방에 들어왔어요? 드림캐처가 걸려 있잖아요. 악마는 못 오는 거잖아요.
'흐읍, 제발, 그, 만..'
강한열
'현지야.'
강한열!
헉, 허억. 한열은 물속에 있다가 수면 위로 올라온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마치 누군가 목을 조르기라도 한 것처럼. 툭. 투두둑. 옅은 회색 이불 위로 물방울이 사정없이 쏟아졌다. 한열의 눈물이었다. 본인은 울고 있단 걸 자각하지 못했다. 숨이 막히는 듯했다
"아악!"
제 몸에 닿은 손길에 놀라 작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구겼다. 온몸이 떨려왔다. 벌레가 몸을 헤집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 탓에 한열은 멀어지는 발걸음을 듣지 못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마저도. 한참 뒤에 떨림이 조금 멎고 난 후에야 한열은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유현의 집이었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한열 혼자였다. 자신을 해칠 수 있는 존재 따위는 없었다. 고개를 돌리니 협탁 위에 물이 담긴 잔과 약이 놓여있었다. 약을 보고 나니 어지러움이 다시금 몸을 장악하는 게 느껴졌다. 몸에 상처가 있다는 걸 알기 전에는 괜찮지만 보고 난 후에는 괜히 아픈 것처럼. 한열은 자기를 위해 놓은 게 맞을까. 먹어도 되는 걸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약을 머금고 물을 마셨다. 잔도, 물도 따뜻했다. 유현이 떠놓은 게 분명했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선배가 나를 위해 신경을 써줬는데. 당장 일어나서 문을 열고 유현을 찾고 싶었다. 고맙다고 전하고 싶었다고. 나를 곁에 둬주어서 고맙다고. 나를 베어도 되는데, 그래주지 않아서 고맙다고. 좋아한다고. 한열은 자신의 몸상태에 비해 꽤나 과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약을 먹고 앉아있자니 곧장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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