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연유/글

반가운 불청객

날겨|란 2024. 11. 12. 23:23

BGM : Agnes Obel - familiar (https://youtu.be/CcrJEC-ztm0?si=mLZuRJ5Ut-Yk-uPB)


우리의 사랑은 투명하고 유령과 같았지.

내가 물 위를 걷는다면 너도 함께할 거야?

"우빈아 잘하고 있어!"

이른 저녁. 물살 가르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어야 했을 그 공간에 밝은 목소리가 더해진다.

"아까보다 더 빠른 거 같아!"

그러나 우빈은 아무런 반응을 돌려주지 않은 채 계속해서 헤엄을 쳤다. 마치 자신을 향한 응원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여기 있을게, 계속!"

우빈의 움직임이 멎었다. 쉬지 않고 물살을 가르던 그는 이제 가만 선 채 관중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이가 걸렸다. 기다렸던 것처럼, 자신을 봐주길 바랐던 것처럼 반갑게 미소 짓는 이. 그러나 우빈은 그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가만히, 그저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머지않아 우빈은 물속으로 가라앉듯이 잠겨들었다. 서서히. 머리까지 완전히 물속으로 들어가자 우빈은 눈을 감은 채 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수를 다 센 후 그는 느리게 수면 위로 오른다. 머리 위에 두둥실 떠오르던 물이 그의 위로 무너져 내렸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조금 전과 다름없는 풍경. 아, 한 가지는 달랐던가.

우빈의 시선은 여전히 관중석을 향하고 있었다. 수 초 전과 달리 그의 시선 끝에는 그 누구도 없었다. 비어있는 관중석. 적막한 수영장. 그 누구의 외침도 들리지 않았다. 공허함을 끌어안은 두 개의 눈동자만이 그곳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랬잖아, 우리의 사랑은 유령 같다고.

너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지.

"우빈아 이제 가려고? 조금 더 수영하다 가지."

몸을 헹구고 옷을 챙겨 나오는 길에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우빈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걸었다. 밝은 머리의 불청객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내내 혼자 말을 이어가면서까지.

"나 너 수영하는 거 더 보고 싶단 말이야."
"조금 더 있다 가면 안 돼?"
"아아, 30분만."

우빈은 모든 말들을 무시한 채 문을 밀어젖힌 채 건물을 나섰다. 저벅저벅. 망설임 따위 없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수영장에서 멀어진 우빈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수영장 안, 출입문 바로 앞에 자리한 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우빈에게 손만 흔들고 있는 이. 그는 그곳에 발이 묶인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우빈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곳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내었다. 물에 빠지고 싶었다. 발끝에 아무것도 닿지 않으면 좋겠다고, 눈을 뜨면 수저이길 바란다고. 우빈은 그리 생각하며 발걸음을 놀렸다. 그의 등 뒤에 자리한 수영장 입구는 적막했다. 인적 없이.

끝없이 반복되는 악몽. 꿈은 더이상 수면 후의 세상이 아니었다. 그것을 넘어 자신의 일상을 지배하려 하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잠에서 깨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들러붙어 저를 갉아먹는 악몽이자 악귀였다.

항상 같은 자리에서 응원하고 있겠다는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는 걸까. 눈에 거슬리는 불청객은 수영장 밖을 나서는 순간 사라지고는 했다. 입구 안에 자리한 채 제 쪽을 바라보기만 한다. 마치 그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곳만이 자신의 세상인 것처럼.



아무리 애를 써도 사라지지 않던 망령인 줄 알았다. 네가 오기 전까진.

찰칵-. 우빈은 들려오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그게 저런 소리를 낼 리가 없는데.

"... 우빈아. 너 찍은 거 아니야."

유지서. 지서였다. 놀란 지서가 우빈이 자신한테 화라도 낼까 싶어 황급하게 말을 터놓았다.

"너가 지나온 자리만 찍었어."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온 지서가 빠른 속도로 말을 쏟아내는 게 보였다. 둘 뿐인 공간에 지서의 말소리, 그리고 잔잔한 물소리가 퍼졌다. 아니었구나. 너였구나.

"진짜 너가 지난 자리만 찍었어 발도 안 나왔어 보여줄 수,"
"알아."

우빈의 입꼬리가 멍하게 올라갔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에 있는 게 너여서 다행이라고.

"마음껏 찍어. 상관없으니까."

이젠 정말 상관이 없어진 것 같았다. 한참이나 지서를 바라보던 우빈은 손을 들어 물을 가리켰다.

"잘 찍어놔."

작은 즐거움이 담긴 말투였다. 우빈은 곧 수경을 고쳐쓰더니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지서는 카메라를 고쳐 들었다. 찰칵-. 다시금 셔터 소리가 울렸다. 지서는 카메라를 내려 자신이 담은 장면을 보았다. 우빈이 지난 자리. 그가 만든 물길이 담겨있었다. 우빈의 모습은 없었다. 다만 사진 끝에 그의 발끝이 자리했다. 지서의 입가에 미소가 걸쳐졌다. 우빈의 사진이었다. 자신만이 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