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계절이 나의 유서였다 5
BGM : https://youtu.be/ywEFK_jbiko?si=8ZpWW43OggeIttSE
강한열은 손이 부드럽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이다.
우리는 매일 만났다. 학교를 오는 날이면 날마다 아침에 얼굴을 마주했고 점심이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도서관에서 만났다. 강한열은 입이 참 무거웠다. 열릴 줄을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 무거운 입을 열게 하는 방법을 유현을 알았다.
"선배 저... 이 문제 잘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항상 따라오는 그 놈의 사과. 유현은 익숙해질 법도 한데 한열이 사과를 할 때마다 왜 기분이 이상한지 모를 노릇이었다. 어린 시절의 당차고 뻔뻔하기도 했던 모습과 많이 대조되어서 그런가.
"어디서 막혀?"
"음...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이 뒤부터 어떻게 접근할 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접근할지 모르겠는 대상이 있다는 부분에서 우린 공통점이 있었다. 유현은 한열이 가리킨 문제를 몇 초 바라보더니 막힘없이 식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답을 완성한 유현이 한열의 풀이와 자신의 것을 비교하며 문제점을 설명했다. 한열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유현의 설명을 들었다. 한열이 토끼였다면 지금 분명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을 테다. 유현은 그리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실수를 했구나."
혼잣말을 참 다 들리게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어린 시절과 비슷한 부분이 보이기도 했다. 유현은 턱을 괴고 다시금 풀이를 이어가는 한열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강한열은 공부와 관련된 일이면 입을 열었다. 몇 주 내내 함께 공부를 이어나가며 알아낸 사실이었다. 특이사항도 인지하고 있었다. 혼자 풀 수 있는 문제에는 절대로 도움을 받거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유현이 고안해낸 건 한열이 풀 수 있는 문제들 사이에 진도를 나가지 않은 어려운 난이도의 유형들을 섞는 것이었다. 처음엔 약하게 난이도를 올렸으나 머리가 참으로도 비상한 그가 몇 번 난항을 겪더니 스스로 답을 찾아내는 꼴을 몇 번 목격하고는 모의고사 지문 중 정답율이 5% 이하인 문제들을 추려내 풀게 시켰다. 작전은 통했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풀리지 않는 문제였던 건지 꽤나 오래 고민하다가 입을 연 한열이었다.
"선배, 저...."
"모르는 거 있어?"
"네. 죄송해요. 이거 하나만..."
풀이를 적어주기 위해 한열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한열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유현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그 이후로는 이런 패턴이었다. 유현이 준비한 자료들은 항상 한열에게 버거웠다. 하지만 한열은 끝끝내 매달려 할 수 있는 만큼 풀고 남은 건 유현에게 의존했다. 처음에 입을 연 건 유현이었다. 못 풀겠다는 말도 하지 못해서 눈치만 내내 보고 있는 꼴을 참다 못해 조용히(아니다. 한열의 문제지를 멋대로 가져가 풀이를 적었고 돌려줄 때는 '모르면 좀 물어봐. 뚫어져라 본다고 답 안 나와.'라고 말을 하기까지 했다.)알려주기도 했다. 그 이후는 나름 순탄했다. 유현의 전혀 친절하지 않은 그 말이 한열에게는 어떠한 승낙의 표시로 다가온 건지 막히는 부분이 생기면 유현에게 묻기 시작한 것이었다. 유현은 그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유현의 집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임시공휴일로 지정된 날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 있었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열을 초대했고, 강한열은 굉장히 강한열스럽게 망설이더니 이내 승낙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금 있으면 한열이 도착할 것이다. 유현은 방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잠시 휴식을 취하려 앉았다. 지잉. 진동 소리에 폰을 확인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그러나 지독하게도 익숙한 번호. 유현은 머리가 아파오는 기분이었다. 울리는 전화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곧 진동음이 멈추는 게 보였다. 곧이어 문자 알림이 도착했다. 또 한심한 사교 모임에 함께하자는 연락이겠지. 진절머리가 났다. 부러 확인하진 않았다.
그때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스쳤다. 교회. 한열과 처음 만났던 그곳. 유현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검색하기 시작했다. 한열은 왜 그때 나타나지 않았을까.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지명과 종파를 덧붙여 검색하자 몇 가지 목록이 나왔다. 이상하다. 유현에게 친숙한 이름은 그곳에 없었다. 없어졌나. 그 순간 바삐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익숙한 이름이 눈에 보였다.
[OO시 남동구 교회서 미취학 아동 대상 폭행...'아동학대죄'로 구속]
유현은 자신도 모르게 기사를 눌렀다. 활자들이 화면을 채웠다.
'팔다리 결박으로 생긴 혈전'
'반복된 구타와 식사 미제공으로 인한 영양실조'
'관련 간부 등에 대한 8차 공판'
'7살로 추정되는 피해자 강 군'
강 군. 유현은 뇌가 멈추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머릿속에 제대로 내용을 입력하지도 못했는데. 흘러들어오는 정보가 너무 많았다. 옷을 갈아입혀 주었을 때 얼핏 봤던 멍자국들. 손목에 있던 선명한 자해의 흔적. 항상 걸치고 있는 몸을 가리는 두터운 옷. 누군가 다가오면 지레 겁부터 먹는 그 모습. 아.
띵동-. 벨소리가 울려퍼졌다. 유현은 멍하니 앉아있었다. 바로 일어나지도 못한 채 가만 있었지만 벨을 울린 주인은 인내심이 참 강한 지라 다시 울리지 않은 채 마냥 기다리는 듯했다. 정신이 든 유현은 걸음을 바삐 놀렸다. 문 앞에 도착한 유현은 급히 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한열이 서있었다. 일곱 살의 어린 아이가. 왜 이렇게 문을 늦게 열었냐며 투정이라도 부리듯이 입을 댓발 내밀고는. 그렇게 서 있었다. 유현은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을 막을 틈도 없이 그는 한열에게 다가가 그를 껴안았다. 품안에서 굳는 그의 몸이 느껴졌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 아이를 혼자 둘 수 없었다. 마음이 시렸다. 심장이 아려서 괴로웠다.
'꼭 오는 거다. 약속이야?'
얽혔던 조그마한 새끼 손가락. 손끝에 느껴졌던 따뜻한 체온.
"...선배?"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스쳤다. 당황 보다 걱정스러움이 더 큰 것 같은 건 기분 탓이다. 그럴 거다. 멍한 기분이었다. 유현은 천천히 한열로부터 몸을 떼내었다. 말간 얼굴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추워서."
추워서 그랬어. 작은 떨림을 간직한 목소리가 뱉어졌다. 한열을 바라보는 제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 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 복합적인 감정 속에 동정심은 결코 섞여있지 않았다.
"어... 추우면 안 되는데..."
혼잣말을 하듯이 내뱉은 한열이 곧장 자신의 가방을 내려놓더니 외투를 벗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유현의 어깨에 자신의 외투를 걸쳤다. 안에는 여전히 긴팔의 두터운 옷을 입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이러면... 조금, 괜찮아요?"
걱정. 그 목소리에 담긴 건 오직 걱정 뿐이었다. 한열은 지금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누가 누굴 걱정해. 유현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안도감을 느꼈다. 잠시 가만있던 유현은 이내 한열이 덮어준 외투를 벗었다. 그의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다시금 한열에게 돌려주려다 한걸음 다가가 직접 그의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왔네."
어쩐지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나갔다. 마치 안 올 줄 알았단 듯이. 어느새 붉어진 코끝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추위를 잘 탈 거면서. 어쩌자고 옷을 벗어준 걸까.
"약속했잖아요."
약속. 그 말에 가슴에 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10년 만이었다. 그 어린 아이는 120개월이 훌쩍 넘는 시간 뒤에야 저와의 약속을 지켰다.
"들어올래?"
소심하게 끄덕여지는 고개.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웠다. 이제 입술을 말아물겠지. 생각대로였다. 느리게 힘을 주어 그를 제 쪽으로 당겼다. 한열이 유현의 공간을 침범했다. 불빛을 등지고 선 유현의 그림자가 한열을 장악했다. 시린 초봄의 공기가 느껴졌다.
정말이지 놓고 싶지 않을 만큼.